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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프로 경기에서 예능 픽이 나오는 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길 것 같으니까 쇼하는 거 아니냐'는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T1이 이번 경기에서 꺼내든 조합들을 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압도적인 체급 차이로 2대 0 승리를 가져가면서도, 그 안에 읽어낼 수 있는 전략 철학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능픽 뒤에 숨어 있는 조합 철학

이번 경기에서 T1이 꺼낸 픽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양도우였습니다. 양도우란 위도우메이커를 픽하되 레킹볼이나 다른 영웅의 구조물 위에 매달려 공중에서 저격하는 변칙 플레이 방식입니다. 지상에서 정석적으로 운영하는 땅도우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팬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예능 픽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제가 직접 중계를 보면서 느낀 건, 양도우는 단순히 보여주기용 퍼포먼스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상대 팀의 앞라인 압박이 약할 때는 공중 위치에서 시야와 각도를 확보하며 오히려 딜 효율이 올라가는 구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문제는 볼트레(레킹볼+트레이서 조합)처럼 기동성이 극도로 높은 정크 픽이 들어올 때입니다. 볼트레란 레킹볼의 돌진 압박과 트레이서의 난입 기동을 결합해 상대 포지션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고기동 핵심 조합입니다. 이 조합이 들어오는 순간 공중에 매달린 위도우메이커는 사실상 타겟 표시등이 켜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번 경기의 핵심 변수였다고 봅니다. T1의 앞라인 체급이 상대보다 확실히 앞서 있었기 때문에 볼트레 압박을 눌러버릴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양도우도 작동할 수 있었던 겁니다. 체급이 비슷한 팀을 만났다면 같은 픽이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크렛 진지 픽과 자리아·벤데타 조합의 팀 컬러

T1의 이번 경기를 보면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왕의 길 맵에서 꺼낸 정크렛 픽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크렛을 왕의 길 한정 예능픽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이번엔 분명히 진지 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크렛의 타이어 궁극기(ult)란 원격 조종으로 굴러가며 대미지를 입히는 궁극기로, 좁은 골목과 코너가 많은 맵에서 상대 소전(소방관, 즉 힐러나 서포터)의 레일건 타이밍을 강제로 낭비시키는 용도로 쓰입니다. T1은 이 타이어를 상대 시그마의 레일건 발사 직전에 굴려보내며 궁극기 턴(ult cycle)을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렸습니다. 궁극기 턴이란 양 팀이 궁극기를 축적하고 사용하는 타이밍을 맞추는 흐름으로, 이 사이클을 먼저 주도하는 팀이 한타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해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궁극기 사이클 운영은 단순히 픽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팀 전체가 같은 그림을 읽고 있어야 가능한 플레이입니다. T1이 자리아·벤데타 조합을 꾸준히 고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자리아·벤데타 조합이란 자리아의 중력자탄 궁극기와 벤데타의 결계성역을 연계해 상대 전체를 한 공간에 가두고 결계 내부에서 궁극기를 쏟아붓는 한타 조합입니다. 상대 입장에서는 결계성역이 깔리는 순간 카운터를 치기가 극도로 어려워집니다.

이스포츠 연구 분야에서도 팀의 조합 정체성 유지가 장기 성과에 미치는 영향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특정 전략 패키지를 반복 훈련해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유연한 메타 적응보다 오히려 높은 승률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은, T1의 접근 방식과 맞닿아 있습니다(출처: ESPN Esports).

이번 경기에서 T1의 조합 운용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리아·벤데타 조합으로 한타 궁극기 콤보 연계를 핵심 승리 공식으로 유지
  • 정크렛 타이어로 상대 궁극기 사이클을 의도적으로 낭비시키는 운영
  • 양도우를 앞라인 체급이 확보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꺼내는 픽 운용

플레타 코치 등판과 미즈키 밴이 던진 신호

이번 경기에서 또 하나의 화제는 플레타 코치의 힐러 포지션 출전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방송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던 순간이기도 합니다. 오버워치 리그 역사상 최고 수준의 딜러로 평가받던 플레타가 코치 전향 이후 현역으로 다시 필드에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게는 보너스였거든요.

특히 중계 분위기가 뜨거워진 이유는 플레타 코치의 시그니처 영웅인 미즈키 때문이었습니다. 미즈키란 오버워치2의 서포터 영웅으로, 아군 버프와 직접 딜을 겸비한 하이브리드 힐러입니다. 플레타 코치가 등판한다는 소식에 팬들은 자연스럽게 미즈키 플레이를 기대했지만, 상대 팀은 경기 시작 전 드래프트 밴(ban) 단계에서 미즈키를 칼같이 지워버렸습니다. 밴이란 상대 팀이 특정 영웅을 해당 경기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드래프트 시스템으로, 상대의 핵심 전력을 사전에 차단하는 가장 직접적인 전략 도구입니다.

솔직히 이건 영리한 대처였다고 봐야 합니다. 플레타 코치의 미즈키 숙련도는 업계에서 공인된 수준이고, 상대 팀 입장에서 루키(신인 힐러)를 기용하며 싸움을 유도하는 상황에서 미즈키를 살려두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플레타 코치가 블리스 선수보다 1대1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포지션에서 미즈키까지 쥐어준다면 계산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버워치2의 경쟁적 드래프트 구조에 관해서는 블리자드 공식 오버워치 리그 규정집에도 밴 카드 운용 방식이 명시되어 있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팀 간 전략 격차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출처: Blizzard Overwatch League).

이번 에피소드에서 팬 입장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사실 플레타 코치의 미즈키를 못 봤다는 것보다, 상대 팀이 그 픽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밴을 당한 것 자체가 플레타 코치의 존재감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장면이었습니다.

결국 이번 T1의 경기는 체급과 팀 컬러가 동시에 증명된 무대였습니다. 예능처럼 보이는 픽 뒤에도 조합 철학이 있고, 코치가 필드에 내려와도 상대가 먼저 밴으로 반응한다는 건 팀 전체의 전략 밀도가 그만큼 두텁다는 뜻입니다. 다만 저는 이 '서커스 조합'이 체급이 비슷한 최상위권 팀을 만났을 때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1이 자신들만의 색깔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 강점이지만, 그 색깔이 메타 변화에도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지가 시즌 후반 진짜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6ZIeCECwL8